아시아의 참 모습을 담은 사진가, 김수남

그는 생전에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현장에서 사진을 찍다가 최후를 맞을 때 가장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2006년 2월4일, 태국 치앙라이에서 촬영을 위한 취재 여행 중 세상을 떠났다. 1970년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할 땐 한국의 다큐멘터리 사진가였지만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는 아시아의 사진가가 됐다.

김수남 사진 굿

인도 라다크에서

인도 라다크에서

1947년 제주 한림에서 태어난 김수남은 연세대에서 지질학을 전공한다. 사진과는 거리가 먼 전공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전공 공부를 하기 위해 들어간 대학이 아니었다.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걸 영어공부, 수학공부보다 훨씬 좋아했던 학생은 대학 입학 선물로 받은 카메라를 들고는 빛과 그림자의 세계에 푹 빠지게 된다. 자연스레 대학 학보사인 연세춘추에서 사진기자를 맡았고 편집장을 지냈다. 졸업 이후에는 월간지 세대, 동아일보 등을 거치며 사진기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지금에 와서 그의 초기작을 살펴보면 이후의 사진과 크게 다른 모습이 보인다. 기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사회의 풍경, 저개발된 국가의 국민들의 생활 등이 중심 주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그는 자신의 필생을 걸 새로운 주제와 만나게 된다. 굿. 미신 타파를 부르짖던 정권에 의해 곧 사라져버릴 것 같았던 한국의 문화였다. 그는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굿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고 여러차례 밝힌 바 있다. 한국인에게 굿은 단순한 미신이라고 하기에는 문화 그 자체였다. 무당은 다른 종교의 사제들처럼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문제를 들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하며 갈등의 해결을 돕는 일종의 상담자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 또한 화려한 의복과 복잡하게 체계를 갖춘 의식, 관객의 참여와 푸짐한 먹을거리 문화까지 굿판은 그 자체로 감정의 정화(淨化)를 돕는 종합 예술 무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신이라는 한 마디로 이 모든 걸 규정하고 나면 다른 건 보이지 않게 마련이었다. 물론 김수남도 처음부터 이런 모든 의미를 깨닫고 굿판에 들어선 건 아니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그는 처음 작업을 시작하던 당시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광주대단지 철거민 가수용소

광주대단지 철거민 가수용소

그 때 나는 좋은 무당이 뭔지도 몰랐고, 가치있는 굿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그 속에 문화가 있고 예술이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내 눈에는 몽땅 같은 것으로 보였는데 그걸 사진적인 감각만 신경써서 표현하려고, 희한한 장면이나 찍으려고 하니까 무당들 눈에 더 형편없는 놈으로 보였겠지. 결국 한계를 느끼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내 평생 필요에 의해서 공부하기 시작한 건 굿이 처음이었다.

현장을 이해하고, 촬영 대상과 교감하려는 그의 방법론은 곧 현장에서 인정을 받는 그만의 기술로 몸에 익게 된다. 처음에는 굿판에서 무당의 아들이 카메라를 빼앗아 바닥에 내팽개치는 일도 겪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수년간 굿판이란 굿판은 모두 찾아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그는 가장 신뢰받는 사람이 된다. 이후 작업을 함께 해 나갈 학자들과의 교류도 이때 시작됐다. 황루시 관동대 교수는 당시 김수남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묘사한다.

가관이었다. 사람들이 주는 술은 다 받아 먹고 더 달라고 해서도 마셨다. 덕분에 굿판에 있는 마을사람들보다 더 얼굴이 벌개져서 돌아다니는데 그 와중에서도 협조를 구하는 솜씨가 여간 아니었다. 카메라를 가슴에 안고 술 한 잔 걸친,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으면서 부탁하면 무당은 말할 것도 없고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 할 것 없이 시키는 대로 비켜주고 포즈를 취해주고 춤을 추어주곤 했다.

제주도 신굿 불도할망다리추낌

제주도 신굿 불도할망다리추낌

이렇게 그의 작업은 한국의 굿 시리즈로 묶여 나오게 된다. 열화당 이기웅 사장이 김수남의 집으로 찾아와 굿 사진을 찍은 수천컷의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 보다가 제안한 출간 기획이었다. 전국의 굿이 그의 카메라에 담겼고, 굿판에서 만나 사라져 가는 한국의 무속을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함께 나눴던 학자들이 글을 썼다. 그리고 뚝심 있는 출판사가 20권의 사진집을 완간해 내기에 이른다.

가자, 아시아로

1985년, 한국에 '프리랜서'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동아일보사에 사표를 내고 독립을 선언한다. 서른 일곱 되던 해였다.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면서 신문사 일과 자신의 작업을 병행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당시 어느 정도 마무리됐던 한국의 굿 작업을 넘어 아시아의 무속으로 촬영 대상을 확대해 나가려는 계획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당장 해외로 나갈 수는 없었다. 자금이 필요했다. 그 때 일본 국제 교류 기금이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 1988년 김수남은 이 기금을 받아 오키나와 류큐대학 사회학과의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김수남 사진의 또 하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순간이었다. 우선 모든 사진은 컬러로 촬영되기 시작했다. 또 강한 콘트래스트와 원색 계열의 표현력이 넘치는 스타일도 이때부터 확고히 사진 전반에 자리잡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업의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굿을 촬영할 때 그랬듯 아시아의 문화와 무속 신앙, 소수민족의 삶처럼 개발과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떠나기 전이면 취재할 지역에 관한 구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구해서 읽었고, 촬영에 필요한 날짜보다 일주일에서 길게는 보름 이상 먼저 현장에 도착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놀았다. 친해지기 위해서였다. 외국인을 처음 보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인 오지에도 들어가야 했지만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친해지고자 다가서는 이런 방식은 어디서든 효과를 발휘했다. 학자들도 여전히 그와 함께 취재를 나섰다. 다만 한국을 넘어 일본을 비롯해 해외 여러 지역의 학자들이 그의 동료가 됐다는 점이 차이였다.

물론 어려움도 훨씬 커졌다. 중국이 지금처럼 개방되고 발전하지 않았던 1990년,(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게 겨우 1년 전인 1989년이었다.) 김수남은 카메라를 매고 중국의 소수민족을 취재하다 스파이 혐의를 받게 된다. "미개방 지구에 들어가 촬영을 했다"는 혐의였다. 주중 한국 대사관은 커녕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정식 외교 관계도 없던 시절이었다. 필름을 통째로 빼앗기고 벌금을 낸 채로 서울로 돌아온 건 물론이었다.

일본 오키나와 풍년제

일본 오키나와 풍년제

이런 우여곡절의 산물이었던 1995년 전시회 아시아의 하늘과 땅은 아시아 취재의 여정을 정리하는 하나의 기념비 같은 전시였다. 같은 해 김수남은 일본의 대표적인 사진 상인 히가시가와상까지 수상하며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는 아시아의 사진가로 거듭나 있었다. 당시 사진집의 디자인을 맡아줬던 일본 최고의 북 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杉浦 康平)는 그의 사진 세계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예술과 상황이 분리시킬 수 없는 하나의 세계로 녹아든 김수남의 독자적인 세계. 이것이 바로 그가 찍은 거의 모든 사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 아닐까. 김수남은 한국의 샤머니즘을 중심에 놓고, 그와 아시아 각지의 샤머니즘과의 사이에 있는 공통성과 차이성을 찾아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 시점과는 반대로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가슴 깊숙한 곳의 풍경을 하나의 통로로 해서, 아시아 각지의 민간신앙의 다채로움과 생활문화의 독자성을 생생하게 투시하게 된 것이다. 김수남의 사진이 한국인들에게뿐 아니라 아시아 각지의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과 감명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바로 이 역전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그들 모두가 예술가

2005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서전으로 손꼽히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주빈국이 된다. 김수남의 한국의 굿 20권은 이 자리를 위해 한 권 짜리 굿(Gut)으로 다시 제작된다. 한국을 대표할 책 가운데 하나였다. 1979년, 김수남이 굿을 촬영하던 초기, 그가 찍은 한국의 굿 사진은 월간지 '신동아'에 연재되면서 '미신지대(迷信地帶)'라는 제목을 달고 소개돼야 했다. 군사정권이 타파할 대상으로 정해 놓은 미신에 불과했던 굿. 하지만 25년이 흐른 뒤 이제 굿은 한국을 세계에 알릴 때 내세워야 할 한국의 문화로 대접받게 됐다.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해 놓으려는 김수남의 고집과 함께 작업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신념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2006년 2월 접하게 된 그의 비보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어서 열린 2007년의 1주기 전시회. 고인을 추모하는 이 전시회의 이름은 '김수남 사진 굿, 혼(魂)'이었다. 떠나는 사람을 위한 진혼굿 같았던 전시회였지만 어찌 보면 이 전시는 그야말로 그가 카메라에 담아왔던 모든 넋에 대한 이야기에 가까웠다. 과연 어떤 넋이었을까. 김수남은 2005년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문화방송 최상일 PD와 함께 한 공동작업의 결과물로 빛과 소리의 아시아라는 전시회를 연다. 30년 간의 촬영과 15년 간의 민요 채록 작업을 각각 진행한 두 사람의 작업이 어우러지는 자리였다. 이 때 김수남의 이야기가 이 넋을 설명해 주는 것처럼 들린다.

가난하고 초라한 마을이 어느날 갑자기 화려하고 눈부신 모습으로 변신하는 현장에서 내 눈을 의심하며 셔터를 눌러대곤 했습니다. 꾀죄죄한 남방이나 티셔츠 그리고 낡은 바지가 전통의상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이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이들의 문명이나 문화가 서구의 꺼풀 속에 가려져 있었던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꽤 오랜 시간 경험하고 여러 번 마음 세척을 한 후에야 나는 그들의 겉모습만을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마음으로 그들의 모습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예술가였습니다.